순교지 남양

남양성모성지는 조선 후기 병인박해(1866~1873년) 당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끌려와 처형된 역사적인 순교지이다. 『병인치명사적』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 남양 지역에서 신앙을 지키다 남양 포졸에게 체포된 천주교 신자는 총 아홉 명이었다. 이 가운데 네 명은 수원과 서울 등 상급기관으로 이송되었고, 나머지 다섯 명은 남양에 투옥되었다. 이 중 한 명은 석방되었고, 네 명은 끝내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였다.

 

현재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남양 순교자는 정 필립보,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김홍서 토마스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더 많은 신자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순교자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묵주를 손에 쥔 채 기도하며 순교하였다는 기록과 증언이 남아 있다.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이 순교지는 1983년 발굴을 계기로 그 모습을 드러냈고, 1984년부터는 순교자 현양 대회와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성모성지’로 선포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평화와 안식을 전하는 공동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 가장행렬 (1991. 10. 7.)
『치명일기』 418쪽 김 필립보 부분

남양 순교자

정 필립보, 1867년 1월 순교

용인 덕골(더우골) 출신으로, 1866년 11월 남양 포졸에게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고 끝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출처: 『병인치명사적』 22권 122쪽,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27번

 

김 필립보,  박 마리아 부부, 1868년 8월 3일 순교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순교자 132위’에 포함된 부부 순교자로, 충청 면천 중방 출신이다. 신앙생활을 위해 수원 걸매, 신창 남방재, 홍주 신리 등지로 이주하며 생활했고, 김 필립보는 사제 성사를 준비하며 교우들을 지도하는 역할도 맡았다. 박해가 극심해지자 충청도 사위 집으로 피신해 있던 중 체포되었으며, 특히 박 마리아는 남편만 끌어가려는 포졸을 향해 “남편을 따라 함께 죽겠다”며 스스로 포박되어 동행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남양 옥에 함께 갇혀 문초와 고문을 받았고, 체포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함께 순교했다.

 

김 필립보 자료 출처: 『병인치명사적』 11권 48-50쪽, 21권 27-28쪽, 22권 33-34쪽, 24권 16쪽,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21번, 120번, 『치명일기』 418번
박마리아 자료 출처: 『병인치명사적』 21권 27-28쪽, 22권 33-34쪽,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21번, 120번, 《치명일기》 419번

 

김홍서 토마스, 1868년 8월 3일 순교

수원 걸매 출신으로,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순교했다. 그의 아내는 함께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고, 김홍서 토마스는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의 생애를 봉헌했다.

 

출처: 『병인치명사적』 21권 27-28쪽, 24권 16쪽,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21번, 163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