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성화

“저에게 예수님은 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빛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철이나 못에 예수님이 구속된 게 아니라, 거기에서 빛이 나오게 함으로써 십자가가 더는 죽음이 아닌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각하고 싶었습니다.”
— 조각가 고 줄리아노 반지

십자가상

남양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우리는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하는 예수님을 만난다. 이 공간에 들어서는 모든 이를 향해 조용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십자가상과 다르다.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마치 ‘나’를 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몸체만 3.6m에 이르는 이 십자가상 앞에서 누구나 신앙의 본질을 되묻고, 그 물음 속에서 자신만의 응답을 찾게 된다.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겠노라.”(요 12:32)

 

이 말씀을 “십자가가 일어설 때 예수는 모든 인류를 부둥켜안을 것”이라는 고백으로 풀어낸다. 조각가는 십자가 속 예수님을 돌아가신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가 형상화하고자 한 예수님은 고통을 지나 부활하신 분이자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계신 분이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몸체는 섬세한 조형이 가능한 나무로, 십자가는 강인한 인상을 주는 카본 소재로 제작되었다. 따뜻하고 유기적인 재료와 차갑고 견고한 재료의 대비는 시각과 감각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고통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온 십자가는 빛을 머금은 나무 형상과 마주하며 부활과 생명의 징표로 다시 태어난다. “내 목표는 예수님을 현대로 환생시키는 것”이라는 반지의 고백 그대로, 십자가상은 고요한 형상 안에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다.
 

십자가상(the Grand Crucifix), 3.60×3.10 m.
EF 02

성모 영보 정면

성화(the Gigantic Suspended Glasses : the Annunciation and the Last Supper), 2×20×3 m.

성화

남양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성화는 신앙의 전통을 품되 그 표현에서 과감한 전환을 시도한 작업이다. 마리오 보타가 “벽에 붙이는 그림은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성화 역시 공간의 일부로 존재하길 바라자, 줄리아노 반지는 공중에 떠 있는 성화를 구상했다.

그는 오랜 세월 교회 미술에서 반복되어 온 ‘최후의 만찬’, ‘주님 탄생 예고(수태고지)’, ‘성모 방문’이라는 세 가지 장면을 택했지만, 그 도상과 구성은 새롭게 그렸다. 인물의 절반은 그리스도와 제자들 같은 역사적 인물로, 나머지 절반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로 채웠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신앙의 역사와 동시대의 삶은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지는 식탁에서 조용히 맞닿는다. 전통 형식을 따르되 그 안에 동시대의 숨결을 담아내는 반지의 작품 세계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제작 방식 역시 도전이었다. 반지는 앞뒷면이 모두 투명한 대형 크리스털 패널을 맞붙이고 그 내부에 그림을 삽입한 뒤, 천장에 매달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뚫어 브래킷으로 고정하려 했다. 제작의 어려움 속에서 수많은 시도를 거듭한 끝에 패널 위에 직접 프린트하는 방식을 찾아냈고, 앞과 뒤를 완벽히 맞추기 위해 수백 장의 스케치를 반복했다. 그 결과 기술적 난도가 높았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더라도 입체적인 감각이 살아 있으며 공간에서 호흡하는 형상처럼 다가오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가 가장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예술을 수용하던 공간이었듯이, 남양성모성지 또한 오늘날의 종교 예술에 새로운 자극과 실험을 끌어안고 있다. 나아가 예술을 통해 동시대를 성찰하고 그 안의 신앙을 새롭게 조명한다. 줄리아노 반지의 십자가상과 성화는 익숙한 신앙의 형상을 새롭게 되묻는 작업이자, 오늘날의 종교 예술이 마주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자리할 것이다.

EF 03

최후의 만찬 정면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줄리아노 반지는 강렬하고 생동감 있는 표정을 조각하며 인간 존재의 내면을 포착해 낸 세계적인 조각가이다. ‘20세기 미켈란젤로’라는 평가를 받으며, 2002년에는 세계적 권위의 예술상 프리미엄 임페리얼상 조각 부문을 수상했다. 바티칸과 피사의 성당 등 다양한 종교 공간과 작업해왔고, 건축가 마리오 보타와의 협업을 통해 공간과 예술이 만나는 깊이 있는 작업 세계를 구축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