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언덕

“순교자의 언덕은 이름 모르는 옛 순교자들을 기념하기도 하지만, 이 장소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며 순교하고 다시 태어나기로 결단하는 우리 스스로를 기념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아름답고 경건하며 새로움에 가득 찬 풍경, 참회하고 순종하며 평화하는 풍경을 여기에 그렸습니다.”
— 건축가 승효상

 

 

남양성모성지의 시작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희생에서 비롯되었다. 성지는 순교자들을 기리고 살아서 순교하는 길을 묵상하도록 초대하는 장소를 조성하고자 한다. 순교자의 묘역은 성지 입구의 높고 고요한 자리에 계획되었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풍경은 순례자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조용한 마당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순교자의 언덕’을 설계한 건축가 승효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리고, 순교란 무엇인가.

“순교의 한자 ‘殉敎’에서 ‘순(殉)’이 지닌 원래의 뜻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니 순교는 믿음을 따라서 죽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죽어서 평화하는 게 아니라 살아서 평화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을 것입니다.”

 

건축은 땅에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스며들기를 택했다. 지면 아래로 묻힌 너비 3m의 좁은 공간을 따라  순례자는 자연의 결을 느끼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 길은 순교자들의 흔적을 따르는 길 그 이상으로, 신앙의 고요와 무게를 몸으로 체험하는 ‘순례의 길’이 될 것이다.

 

순교자의 언덕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동시에 그 의미를 오늘에 새기기 위한 장소가 되고자 한다. 삶의 자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질문의 공간이자 순교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의 형식임을 일깨워주는 언덕이 되기를 소망한다.

ED 01

건축가 승효상
승효상은 한국 현대건축 1세대인 김수근에게서 수학한 뒤 이로재를 설립하고 땅과 건축, 도시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는 작업을 지속해온 건축가이다.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2016년 서울시 초대 총괄건축가로 활동하며 공공성과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왔다. 남양성모성지 순교자의 언덕에서는 대지 조형 예술로서의 건축적 접근을 통해 땅에 스며드는 공간의 의미를 모색하고자 한다.